Sunday, April 17, 2016

펜탁스 미 슈퍼 (Pentax ME Super)


펜탁스 미 슈퍼는 내 힘으로 구입한 첫 카메라다.

가볍고 해상도 째지는 디지털 카메라도 많은데 굳이 필름 카메라를 샀던 건 순전히 첫 경험 때문이다. 필름 카메라를 처음 경험한 건 미국에 교환학생을 가서였다. 무엇 때문인지 사진 수업을 듣는 게 대학 시절 로망 중 하나였는데, 그걸 미국에 가서 이루게 됐다. 기초 수업이었지만 수강을 위해서는 실습 카메라가 필요했다.

당시 내가 갖고 있는 카메라라곤 월마트에서 산 보급형 디지털 카메라 하나가 전부였다. 훌륭하진 않지만 '기록'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엔 손색이 없는 그렇고 그런 카메라. 하지만 명색이 '사진 수업'에 사용할 실습 카메라로는 영 아니었는지, 교수는 단호한 어조로 조리개를 조절할 수 있는 카메라를 가져오라고 했다. 교수는 이내 내 난처한 표정을 읽었는지, 학교에서 카메라를 싸게 렌트해준다 사실을 일러주었다. 정확한 중간 과정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사진학과 사무실 같은 곳에 쭈뼛쭈뼛 가서는 렌트 비용(20$)을 치르고 운명적 카메라 펜탁스 K1000을 만나게 된다.

분명 조리개를 다루는 방법을 이론적으로 배운 뒤일텐데, 제대로 촬영감을 잡는데까지 한참을 헤맸다. 현상을 하면 절반 이상이 시커먼 상태로 나왔다. 나의 미국 생활은 아주 유복했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는 안 하고 살 정도였다. 그래도 필름을 사고, 또 그걸 현상하는 건 결코 적은 돈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차도, 자전거도 없는 뚜벅이 신세였기 때문에 현상에 들어가는 부수적 비용 - 교통비, 버스 대기 시간 등등 - 까지 더하면 많은 값을 치러야했다.

수업 첫 번째 과제로 제출했던 인물 사진/ Pentax K1000

우선, 결과물을 얻으려면 현상소가 있는 월마트나 혼바커스 혹은 타겟에 필름을 맡기러 가야했다. 배차 시간이 적어도 30분 이상이 되는 버스를 기다려 마트로 향한다. 간다고 결과가 바로 나오는 건 당연히 아니다. 몇 일 후, 결과를 손에 받아들기 위해서 똑같은 과정을 거쳐 마트에 찾으러 간다. 나는 '아날로그'라는 단어를 이 무수히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배운 것만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까맣기만 했던 필름은 점점 선명한 색으로 채워졌다. 학기 막바지에 다다라 찍은 사진들은 지금 봐도 마음에 든다. 찍을 때는 결과를 알 수 없어서 설레고, 맡길 때는 내가 뭘 찍었나 궁금했다. 마음에 드는 현상 결과를 받아들고 오는 날은 허밍이 절로 나왔다. 요즘 사진관은 웹하드나 웹 사이트를 통해 현상의 결과물을 제공하지만, 그때만 해도 현상 결과를 CD에 구워 담아줬다. 기숙사에 돌아와 그 CD를 노트북에 넣고 지이잉- 거리며 로딩되는 사진을 기다리는 재미란.

봉사활동 차 방문했던 미국 뉴올리언즈 시장/ Pentax K1000

펜탁스 K1000과 정이 들대로 다 들자, 학기 말이 되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수업이 다 끝나고 내 손에 길들여진 카메라를 반납하러 가는 길은 아쉬움으로 가득했을 거다. 늘어난 살림살이 중 쓸모 없는 것들을 버리고, 정든 카메라와 헤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자 미국 생활은 어떤 세레모니도 없이 끝나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난 졸업 전까지 단 1학기를 남긴 5학년 신세가 되어 있었다. 필름 카메라? 당연히 잊고 살았다. '잘난 게 이렇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취업을 하지?' 가슴 졸이던 그 시기를 지나 11년 가을 정도였을까? 12년 봄 쯤 되는 것 같다. 다시 사진이 찍고 싶어 카메라를 고르게 되었을 때, 디지털 카메라가 아닌 필름 카메라를 고려한 건, 내겐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내게 친숙한 필름 카메라 브랜드라고는 펜탁스밖에 없었으니, 자연스레 검색창엔 펜탁스를 입력했다.

중고나라를 통해 펜탁스 미 슈퍼를 내놓은 어떤 판매자를 만났고 진정한 의미의 나의 첫번째 카메라, 펜탁스 미 슈퍼를 전달 받게 된다. 참 신기하게도, 오랜만에 필카를 마주하자 다시 조리개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카메라 수업에서 기록한 필기를 꺼내보기도 하고, 당시 촬영한 사진들을 살펴보면서 서서히 카메라와 다시 친해져 갔다.


한국에 돌아와 촬영한 첫 4통의 필름들 중/ Pentax ME Super

폴더 '펜탁스 미 슈퍼'에는 사진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5년 정도 사용했으니 연애로 치면 권태기가 왔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사이였지만 나는 이 카메라를 의심 없이 좋아했다. 무거워서 힘들어질 걸 알면서도 여행에 데려갔고, 사람들에게 많이도 자랑했다. 내 추천으로 필름 카메라를 잡기 시작한 사람도 생겼으니, 미 슈퍼는 나와 내 주변에 꽤나 큰 영향력을 행사한 셈이다. 사진을 촬영하는 방식은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의 꽤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좋아하고 또 그만큼 믿고 썼던 내 카메라, 미 슈퍼가 잔고장이 나기 시작한 건 한 2년 전부터였다. 잘 쓰다가 그렇게 된 거였는데도, '80년대에 생산된 제품이니 이정도 고장이 나는 건 당연해' 라며 치부했다. 고장이 나 여행에 데려가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여행에 데려가서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채 돌아오는 날도 생겼다. 이때가 권태기라면 권태기였을까.

카메라가 고장난 줄도 모르고 열심히 찍었다/ Pentax ME Super

하도 같은 증상으로 수리점을 찾게 되니 의심이 들어 다른 수리점에 데려갔을 땐, 이미 미 슈퍼의 수명이 다해 있었다. '공식 AS센터'라는 타이틀을 믿고 데려갔던 곳인데, 알고보니 요새는 DSLR이 훨씬 중요한 품목이다보니 필름카메라 전문 기술자는 없던 거였다. 기름 범벅이 되어 있는 미 슈퍼 내부를 보고 단숨에 공식 AS센터에 전화를 걸었지만, 2년 간 내 카메라를 만졌던 담당자는 하필 그날 휴가였다. 이 다음에 다시 전화를 걸어 '당신이 내 카메라를 망가 뜨렸다'는 죄책감을 반드시 심어줘야 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걸지 않았다.


이후 새로운 카메라를 들이지 못한 채 넉달이 흘렀다.

그 사이 집에 있던 DSLR을 만져보기도 하고 '요새 스마트폰이 얼마나 좋은데'라며 허전함을 달래보지만, 오히려 그런 순간엔 펜탁스 미 슈퍼가 더 많이 생각난다. 수리점 아저씨가 배를 내놓은 내 카메라 너머로 전한 마지막 말과 함께. '이건 이제 장식품으로 사용하세요. 나한테 싸게 파시든가.'